documentary

BBC 다큐10 - 우주전쟁 (SPACE RACE)

꼬마사자 2010. 4. 8. 22:26

2년전인 2008년도 하나TV를 설치한 후 다큐채널에서 처음 본 영상이다.

총 4부작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시간 30분 가량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BBC에서 2005년 제작된 작품이다.

 

우주전쟁.. 미래를 암시하는 느낌의 이 영화제목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로켓의 개발로 인류가 달에 도착하는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주인공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로켓 개발자 '폰 브라운 박사' 와 '세르게이 코를료프'의 숨막히는 우주경쟁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배우들을 기초로 한 다큐멘터리 인것이다.

 

 

'폰 브라운' 박사는 독일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의 장교였으며 V로켓의 핵심 개발자 였다.

그는 독일의 패망과 동시에 연합국에 항복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로켓개발의 중심에 서게 된다.

 

 

 

'세르게이 코를료프'는 소련인으로서, 대학교 시절까지 계속 로켓에 대한 꿈을 가지고 시험발사를 하는등 재능많은 청년이었으나

스탈린 독재와 함께 더불어 친구의 억지주장에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훗날 그의 천재적 능력을 알아챈

소련군기관에서 다시 데려오게 되고, 그는 소련 로켓개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들 둘은 서로 마주한적이 없다. 특히 소련과학자 '코를료프'는 보안을 위해 일반인에게 조차 그 존재가 감쳐줘 있다가

사후 엄청난 장례식때 그의 사진이 최초 공개되었다.

 

 

 

 

이 두사람은 국적이 달랐지만.. 이상향은 동일했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저 먼 달로 인류를 보내는것... 그들의 이상향은 순수했고 정열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가본적이 없는 길.. 먼 우주로 로켓을 발사한다는 것은 곧 수많은 시행착오를 의미한다.

많은 실패와 재시도.. 폭발... 인명피해발생.. 등 이들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

 

고체연료를 사용할것인가? 액체연료를 사용할것인가? 추진력을 위해 어느 수준까지 위험을 감안해야하는 것일까

압력은? 기체의 진동 수준은? 안정성은?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겨우 1M를 올라가고 터진 로켓이다.

 

엄청난 예산을 쏘아 부으면서도 계속 로켓개발과 우주경쟁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핵미사일이다. 핵탄두는 양국이 모두 보유하고 있으나 당시의 로켓미사일은 그렇게 먼거리를 날아갈수는 없었다.

바로 이 대기권을 뚫고 나가는 로켓을 개발하여 핵탄두를 실으면.. 그것이 바로 핵미사일.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되는것이다.

 

정부와 군의 이런 야심찬 계획아래.. 이 두 과학자들은.. 오로지 인류를 저 우주멀리 내보내는 것에 촛점을 두고 경쟁해 나아갔다.

 

미국의 '폰 브라운'박사보다 소련의 '코를료프'는 대담했고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더 먼저 로켓발사를 성공했고, 더 먼저 세계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를 발사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는 미국에 이른바 '수푸트니크 쇼크' 를 불러왔다.

그것은 바로 언제 어디서 소련이 핵미사일을 미국에 떨어뜨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일으켰다.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 스푸트니크 쇼크)는 1957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미국과 서방자본주의국가들이 겪은 과학기술 · 교육부문의 충격을 말한다. (위키피디아)

 

이를 계기로 미국은 NASA(미항공우주국)을 설립하게 된다.

 

 

 

세계최초의 우주인 '가가린' 마저도 소련에서 먼저 배출해냇다.

미국의 우주과학자 '폰 브라운'은 이제 여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게 된다.

미국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미국의 모든 관심은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는데 촛점을 모으게 되었다.

신임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연설을 통해 10년내에 인류를 달에 보내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로켓발사의 실패확률은 예전에 비해 많이 낮아졌지만, 로켓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소련은.. 60~70년대를 겪으며 경제적으로 뒤쳐지기 시작했다.

이미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확보게된 소련에서는 자연스럽게 우주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소시켰다.

소련은 굳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인류를 달에 보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1966년 1월

불굴의 의지와 정열로.. 소련의 우주개발을 진두지휘해온 '세르게이 코를료프'가 종양수술을 위한 마취도중 숨을 거둔다.

모스크궁전 앞에서 거대하게 치뤄진 장례식에 최초로 '코롤료프'의 이름과 사진이 대중에 공개되었다.

그는 낙후된 과학의 상황에서도 모든것을 진두지휘하며, 조국의 우주과학에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코롤료프' 가 사망한 3년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에 성공했다.

 

 

오랜 시간 '폰 브라운'과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그리고 모든 인류가 꿈꿔온 달착륙에 성공한 것이다.

이 두사람의 우주에 대한 정열이 없었다면 우주개발은 더 뒤쳐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폰 브라운'도 NASA를 떠난 5년뒤 암으로 숨졌다.

'폰브라운'은 미국에서는 새턴, 머큐리, 아폴로 등 수 많은 프로젝트에 지휘했으며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R7 로켓, 소유즈로켓을 유산으로 남겼다.

 

 

       

 

                                       (1938년 32세의 세르게이 코롤료프)                 (1962년의 52세의 폰 브라운) 

 

추천도: ★★★★★